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 사태 (문단 편집) == 김신조 루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6741B33552C986305.jpg|width=100%]]}}} || || {{{#fff '''김신조 루트'''}}} || [clearfix] '''전체 진격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7ab7fd3-5d87-4e20-bb10-541e1396e007.jpg|width=100%]]}}} || || {{{#fff '''김신조 루트'''}}} || [clearfix] '''약식 진격로''' [[1월 13일]]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황해북도)|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했다. 당시 1월 21일은 '''[[일요일]]로서 [[6.25 전쟁]]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주기 위해 날짜를 계산하고 투입한 것이다.''' 겨울에 투입한 이유도 국군과 [[주한미군]]이 겨울에는 훈련도 잘 안 하고 추위로 인해 근무도 대충 선다는 이유에 날짜를 겨울로 계산한 것이라고 한다. * '''17일''' * 20:00 [[북방한계선]] 돌입 * 23:00 [[남방한계선]] 돌파[* 당시 남방한계선은 대부분 지역이 나무로 만든 [[삼발이]] 정도밖에 설치되어 있지 않는 등 방비가 허술했다. 남방한계선이 완전히 철책으로 둘러진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특히 미군과 한국군의 담당 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침투하여 더욱 손쉽게 돌파 가능했다고 한다.] * '''18일''' * 00:00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 * 02:00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 임진강 북쪽에서 1숙영지를 편성. * 21:00 1숙영지 출발 * 22:00 임진강 빙판위를 걸어서 도섭[* 渡涉, 물을 건넘] * '''19일''' * 05:00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삼봉산('''파평산''' 부근) 능선에 2숙영지 편성 * 14:00 즈음 124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쳤고[* 이만갑에 출연한 김신조는 이 때부터 어렴풋이 "아, 이건 실패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이에 북에 무전을 쳐서 어떻게 할지를 물어봤으나 회신된 암호를 풀지 못해[* 후술하지만 '''복귀하라는 명령'''으로 밝혀졌다. 북한 입장에서는 공비 한 명 키우는 데 오랜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에 침투 사실을 들킨 이상 차라리 복귀시키는 편이 합리적이었던 것. 하지만 이때부터 해석을 할 수 없어 복귀 명령임을 몰랐던 공비들은 아예 침투기간 내내 무선침묵을 해 버렸다. 이때 김신조는 "아 [[북한|당국]]이 [[적반하장|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암호를 풀지 못한 이유는 본인들에게 있었는데 [[난수방송]]을 통해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방송을 듣는 데는 성공했으나 해석하기 위한 난수표를 '''잘못된 것으로 들고왔으며 정작 가져와야 할 난수표는 놔 두고 왔기 때문이다'''(...)] 다음의 이유를 들며 투표를 통해 살려 주기로 결정했다. 1.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 후일 김신조의 인터뷰에 의하면 작전 도중 만나는 민간인은 모두 죽이라고 지침을 받았는데 시체를 숨기기 위해 한겨울에 꽁꽁 언 땅을 파기 귀찮아서 혹은 이들의 행색을 보고 불쌍해서 땅 파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그냥 살려줬다고 한다. 동료들 중에는 죽이자는 사람도 있었는데 김신조는 말렸다고 한다. 훗날 모 종편방송 인터뷰에선 4형제 중 2명은 돌아가시고 나머지 분들과는 아직도 연락하고 만나기도 한다고 했다.]는 이유 1. 죄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 공비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 아래에서 해방시키려고 대남공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이유 1. 우씨 형제 중 한 명이 거짓으로 김신조 일당을 인민해방을 위해 북에서 내려온 전사들이라며 환영하는 척했는데 이에 넘어갔다는 이유[* [[https://n.news.naver.com/article/021/0002439560|김신조 “北선 비겁자, 南선 공비 손가락질…‘꿋꿋이 살라’ 백선엽 격려 큰 힘”, 2020-08-21, 문화일보]]에 의하면 김신조 일당들은 자신들이 환영받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우씨 형제들을 죽일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1. 어차피 작전은 금방 끝난다는 이유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살려주기로 하되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북에서 큰 포상을 받게 해 주겠다"며 행로를 북으로 알려주고 풀어주었다.[*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적에게 아군의 존재를 누설할 것이 뻔한 이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석방해야 하는가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한다는 전제 하에) 매우 복잡한 딜레마가 된다. [[레드윙 작전|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 영화 [[론 서바이버]]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오는 소재. 영화 론 서바이버의 배경이 된 실제 레드윙 작전에서는 4명의 [[네이비 씰]] 대원들이 자신들을 발견한 양치기 3명을 죽일지, 살릴지 의견이 서로 갈렸는데 결국 지휘관인 마이클 머피 대위가 풀어주라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풀려난 양치기 소년이 탈레반에 알려서 네이비씰 대원 중 3명이 사망했고 그들을 구원하러 온 치누크 헬기도 격추되어 탑승자 20명이 몽땅 사망했다는 처참한 결말. 당시의 유일한 생존자가 론 서바이버의 저자 마커스 러트렐이다. 그러나 이는 가려들어야 하는 게 마커스 러트렐을 살려준 현지 주민에 의하면 '''헬기 소리가 너무 커서''' 진작 위치가 발각되었다고 한다.] 집에 온 나무꾼 형제들은 저녁식사를 하며 덜덜 떨다가 가족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바로 이실직고를 하고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공비들을 신고하였고 파출소에서 경찰서를 거쳐 미군과 국군에 통보되어 즉각적인 경계태세가 발령되었다. 국군은 유류품과 비트 잔여물을 확인함으로서 발언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하여 공비들의 행로를 추적해 이들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미군 경계지역에 대한 작전권까지 이양받아 신속하게 북한산과 서울시에 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했다. 또 철도, 군 인사에 대한 암살 등 다대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서울시 외곽과 경복궁 등 요충지에 병력들을 긴급히 배정&증파하고 있었다. 즉 당시 대한민국의 대응은 결코 늑장대응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동속도가 국군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빨라 공비들은 차단선을 빠져나왔다. 산악 지형에서 무려 시간당 10km의 속도로 질주했던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2회에 나오는 정보에 따르면 이 속도를 무려 30kg 완전군장을 하고 맨발로 주파했다고 한다. 이미 남파 전에 최종 인원을 정하고 산악지대에서 맨발로 완전군장을 한 상태로 신속하게 목표 지점까지 주파하는 반복 훈련을 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완전군장 후 산악행군 속도는 평균 시속 4km로 [[김성은(군인)|김성은]] 당시 [[국방부 장관]]은 "[[파주시]]에서 [[북한산]]비봉까지 행군을 한다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이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완전군장한 채로 그렇게 빠른 속도로 행군한다는 것은 내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 발언했다고 한다.] * 19:00 [[나무꾼]]들을 풀어줌 * 21:00 공비들 2숙영지 출발. [[나무꾼]]들이 파출소에 신고. 이 시점부터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이 시작되었다. * '''20일''' * 02:00 국군 25사단 '''파평산 포위'''[* 공비 출발 시간과 5시간 정도 차이난다. 다만 국군의 대응은 상기 서술과 같이 당연히 이게 전부는 아니다. 해당 지역 담당 사단인 25사단의 즉각적 대응을 기준으로 공비 위치와의 간격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한 것 뿐이며 실제로는 지역 위아래로 전부 차단선이 펼쳐지는 것은 물론 국가 단위로 긴급대응 중이었다.], 공비들은 국군의 대응을 예상하고 속도를 높임 * 09:00 [[진관사]]를 우회하여[* 이들은 나무꾼들을 풀어 주고 난 후 북한산 계곡을 따라 이동하던 도중, 북한에서 받은 지도에는 없던 절이 나타나 당혹스러워했다 한다. 진관사는 6.25 때 파괴된 절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부터 마침 재건 중이었다. 북한에서는 이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으니 6.25 당시를 기준으로 지도를 만들었을 테고, 이로 인해 그들의 지도에는 누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상 밖의 상황이었던 데다가 절의 개까지 짖어대 위치가 노출될까 봐 매우 불안해했다고 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20181|"박정희 목 따러 왔다"는 김신조, 진관사 앞에서 멘붕, 2020-11-14, 중앙선데이]]] 앵무봉을 통과해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탐. 비봉 북방 도착, 3숙영지 편성 * 21:00 3숙영지 출발 * '''21일''' * 05:00 비봉 동쪽에 4숙영지 편성[* 예정에 없던 숙영이다. 길이 험해서 많이 못 간 것.] * 19:00 공비들 사복 환복 후 서울 시내 돌입 * 21:55 [[서울서대문경찰서|서대문경찰서]] 이각현 서장이 공비들을 발견 * 22:05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 소속 [[형사]]들의 검문, 공비들이 [[최규식]] 서장에게 발포하면서 교전 발생 이들은 낮에는 쉬고 밤에 이동하는 등 산으로 침투하면서 이목 자체를 최대한 피하다가 침투용이었던 26사단 마크가 달린 국군 군복을 입고서도 마주친 나무꾼 4형제에게는 방첩대나 국군이라고 속이지 않고 오히려 '''연이은 침투성공에 기고만장하여 자신들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선봉대라고 알려주었다.''' 이후 21일 시내 돌입 전 사복으로 '''환복'''하고 코트 아래 기관단총 등의 장비를 갖추어 19:00 경에 서울 시내에 진입하였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군, 경 검문시 방첩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시간이 21일 19:00 경 부터인데 이때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목적이 대통령 암살인 것은 예측하지 못했기에 청와대 자체 경계는 오히려 소홀한 편이었다.'''[* 국군에게는 심리적 기습에 가까웠는데 다대한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무려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것은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회고록과 보고서에도 일관되게 '청와대 경비를 놓쳤고 그때 공비들이 습격했다면 그대로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다는 점에서 국군에게 다대한 충격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제2방어선이었던 경찰이 공비 침투에 대비하여 서울 시내를 순찰/검문하고 있다가 천만다행으로 탐지한 것'''이다. 공비에 대비하여 순찰하다가 복귀하던 [[서울서대문경찰서|서대문경찰서]] 이각현 서장이 '''직접'''[* 서장이 순찰을 돌고 있다가 직접 발견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결코 정부 차원에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2시간이 넘도록 성인 남성 30여 명이 코트를 입고 무리지어 다니는 걸 아무도 묻거나 검문하지 않았다는 점(적지 않은 통행인 및 군경들을 지나쳤다)이 더 비판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21:55 경에 '''2열종대로 둘 셋씩 붙어가던''' 이들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이각현 서장이 검문을 시도했으나 공비들이 CIC라고 주장하였기에 더 물어보지는 못하고 후술할 조치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많다. 다만 이 경우에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추적감시하는 걸 방첩대라 무조건 열어 줬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서장은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즉시 시 경찰망에 무장공비 의심 전파하면서 관계기관에 훈련이 있는지 확인, 헌병 3명 포함 병력 14명을 소집하여 짚차 2대, 트럭 1대에 태워서 차량 추적을 명령하고 30사단 작전참모에 동원병력을 소집할 것을 요구하여 이에 따라 22:00부로 해당 구역에 병력 배치가 시작되었다. 무장공비들이 이 추적을 따돌리고 마주친 '''최초의 검문소가 바로 후술할 두 형사가 있었던 곳'''이다. 22:05분에 '''본인들은 CIC 소속으로 훈련 복귀 중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했으나 형사들은 뭔가 수상하다고 낌새를 눈치채고 시간을 끌다가 코트 속 총기를 식별하였다. 따라서 최소한 침투 과정에서 CIC라면서 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